[집중인터뷰] (2) 배우 이병헌이 가는 길
H.O.N.E.Y/News 2008/08/25 15:50 |[집중인터뷰] (2) 배우 이병헌이 가는 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찍으시면서 연기 외적으로 가장 좋았던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배우든 감독이든, 아무래도 이쪽 일을 하시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역마살이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새로운 것을 접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번 영화에 참여하면서 특히 좋았던 것은 광활한 중국의 사막에서 말을 타고 질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정우성씨야 그런 쪽으론 저보다 선배지만, 저는 이전에 그런 장면을 찍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예전부터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종종 했어요. ‘배우로서 기본적으로 교통 수단에 해당하는 것은 다 익혀둬라’고 말입니다. 수영이나 운전 혹은 승마 같은 것을 얘기했던 거죠. 비행기 조종이야 너무 힘드니까 빼더라도 말이에요.(웃음)
그러면서 정작 제가 지금까지 승마를 배우지 못했어요. 나도 못하면서 후배들에게 충고했던 게 마음에 좀 걸렸는데, 이번에 그걸 해소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이병헌. ⓒ 이동진닷컴-사진가 김보배 |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승마를 처음 배우셨는데도 일단 말에 오르면 말이 빨리 뛰지 않는다고 계속 채근하셨다면서요? 대단한 강심장이신 것 같습니다.(웃음)
“말이 뛰면 긴장감은 당연히 있죠. 그런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말이 빨리 뛰어야 금방 촬영이 끝날 것을, 미적대다 보면 한없이 촬영이 길어지면서 사고 가능성만 높아지거든요. 결국 달리는 말 위에 오래 있기 싫어서 더 채근을 한 겁니다.(웃음)”
-그런데, 멜로를 찍는 것과 이렇게 남자들만 떼거리로 나오는 영화를 찍는 것은 배우에게 전혀 다른 경험이겠죠?(웃음)
“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을 때도 좀 비슷했지만, 촬영 중 중국 숙소에서 지낼 때는 진짜 훈련소 내무반에서 지내는 느낌이더라고요.(웃음) 육체적으로는 고되지만, 그게 끝을 알고 하는 고생이기에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죠. 남자들끼리 있기에 때론 땀 냄새도 나고 좀 지저분해지기도 하지만, 끈끈한 정을 서로 느낄 수 있는 게 참 좋아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정말 제대로 ‘폼’ 나는 영화입니다.(웃음) 이병헌씨는 말 위에서 권총을 겨눌 때 어깨 뒤에서부터 총을 잡아 뽑는 듯한 자세까지 취하시던데요?(웃음)
“김지운 감독님 작품에서 연기할 때는 ‘폼’에 대해 별로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멋을 정말 잘 내실 줄 아는 분이라서, 감독님이 다 알아서 포장해주거든요.(웃음) 현장에서 자꾸 .N.G.가 나면 배우들이 속으로 불평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중에 극장에서 그 장면을 보면 ‘내가 저기서 저렇게 멋지게 했단 말야?’ 싶은 생각이 절로 들죠.(웃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는 그런 멋진 ‘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배우들도 감독님 못지 않게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고 들었어요. 김지운 감독님은 배우들의 액션 아이디어가 많아서 오히려 자제시키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하시던데요?(웃음)
“제 경우 원래 촬영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이에요. 질보다는 양이죠.(웃음) 큰 욕심 안 부리고 얘기해요. ‘이거 꼭 해야 돼요’가 아니고, ‘이중에서 좋은 거 있으면 고르세요’라는 식이죠. 자질구레한 것들도 많이 말해요. 이 영화에서 채택된 제 아이디어 중 하나는 장갑을 짧게 한 것이었어요. 장갑이 손목의 선에 딱 맞으면 뭔가 프로페서널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서 그렇게 제안했죠. 저 때문에 의상팀이 고생했을 거에요.”
-오른쪽 눈 부분을 가리는 독특한 헤어 스타일은요?
“그건 제 아이디어와 헤어팀의 의견이 흡사했던 경우였죠. 각각 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맞춰보니 아주 비슷하더라고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데, 자다가 일어나 상반신을 벗은 채로 단검을 날려 전갈을 해치우는 장면이 나오니까 곳곳에서 여성 관객들의 탄성이 터지던데요? 작심하고 제대로 팬 서비스 하신 것 같더라고요.(웃음) ‘달콤한 인생’에도 비슷한 설정의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웃음)
“저는 사실 그런 부분에서 설경구씨가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거든요. 그렇게 급격하게 살을 빼거나 찌우면 건강에도 안 좋을 수 있는데 말이에요. 로버트 드니로나 크리스천 베일도 마찬가지겠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시나리오를 처음 보면서 든 생각은 육체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것이었죠.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은 아무래도 감성일 거에요.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늘 관건이죠. 그걸 위해서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 인물의 이미지에 최대한 가깝게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그 장면은 길지 않은 신이지만, 거기서 몸의 상태가 질겨 보이면, 독하고 악랄하며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창이 캐릭터에겐 제 격일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락부락한 선수의 몸이 아니라 좀 갈라지는 듯한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이병헌씨는 멜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 배우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액션이나 누아르 쪽의 영화를 많이 찍으셨죠. 이병헌씨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훑어보면, 2~3년 전까진 본인의 스타일이나 이미지에 맞는 쪽으로 작품을 꼼꼼하게 골라서 출연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달콤한 인생’ 이후부터는 의외성을 허용하면서 좀더 과감하게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 같아요. 이제는 다른 그릇에 스스로를 넣었을 때 어떤 모습이 나올지에 대해 어느 정도 즐기면서 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지적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 해 여름’을 끝내고 트란 안 훙 감독님의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출연 제의가 와서 고민할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그 영화는 제작 환경도 이야기도 캐릭터도 모두 낯설어서 출연 여부를 놓고 고민하다 보니까, 그 과정에서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까요. 제 속에서 닫혀 있던 뭔가가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나 봐요. 그러다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악역을 하기로 결정했고, ‘지아이 조’ 제의까지 왔을 때는 ‘에이, 그 두 영화까지 하기로 했는데, 뭘’이라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심했죠.(웃음)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생겼다고 할까요.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은 후회가 들기도 했고요. 어차피 제가 하는 일은 새로운 일을 할 때 더 쾌감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는 작업이니까요. 그리고 나 자신이 새로운 모습에 도전하면,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께도 또 다른 선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사실 그 동안은 너무 신중하게 해왔던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든 너무 지나치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선택한 영화들을 해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지난 1년간 그 영화들 출연으로 정말 바쁘게 지내셨는데요.
“그렇게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은 제게 무척 고통스런 시간이었어요.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이전의 성격까지 단번에 바꿔버리진 못하는 것이니까요.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어요. 이미 버스는 떠났고, 망망대해를 혼자 헤엄치고 있는데, 힘은 점점 없어지고 방향도 잘 모르겠고 앞에는 보이는 섬조차 없는 듯한 느낌이었죠. 일단 주사위가 던져졌으면 거기에 순응해서 즐기면 되는 것인데, 그 순간마저도 제 머리 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더라고요. 그러다 ‘지아이 조’까지 다 끝내고 나니 비로소 홀가분해졌어요.”
-극중 멜로적 관계에서 쑥스러워하는 연기가 대단히 생생합니다. ‘달콤한 인생’의 밤 골목길 장면에서 선우가 당당하게 따져 묻는 희수 앞에서 버벅대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일을 처리할 땐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선우라는 프로페셔널이 저렇게도 당황하는 걸 보면 정말로 희수를 좋아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모습이니까요. ‘번지 점프를 하다’도 같은 맥락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고요. 이병헌씨의 팬들은 그런 모습을 매우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에서와 같은 능숙한 ‘선수’의 모습은 덜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아, 그런 가요? 곧 시작하게 될 드라마 ‘아이리스’에서도 빈틈이 많은 인물로 그려달라고 해야겠다.(웃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네요. 몰랐던 부분이거든요.”
-정말로 모르셨어요?
“네, 몰랐어요, 진짜로. 그게 참 문제인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청사진을 그려줄 수 있는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듯 싶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어떤 색깔의 배우인지 훤히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장점과 단점을 다 파악하고 있기를 바란 거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만 알고, 자세히는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그런 걸 다 알고 나면, 뭔가 연기가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아요.(웃음)”
-이병헌씨는 배우로서 상당히 좋은 목소리를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캐릭터에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감성이 담겼다고 할까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창이처럼 극악무도한 캐릭터에게서조차 그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뭔가 그 인물에게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단 말이죠.(웃음) ‘달콤한 인생’이나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선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고, ‘마리 이야기’나 ‘아마게돈’ 같은 애니메이션에선 목소리 연기로 참여하기도 하셨죠. 배우로서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시죠?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이병헌. ⓒ 이동진닷컴-사진가 김보배 |
“목소리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제 목소리가 좋긴 한 거 같아요.(웃음) 하지만 ‘그 목소리, 예술이다’고까지 과하게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계신데, 그 정도는 아니죠. 어렸을 때는 제 목소리가 콤플렉스였어요. 어릴 때 저희 외가 친척들이 다 미국에 살아서, 가족들이 종종 카세트 테이프에 하고 싶은 인사말을 담아 보내곤 했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저는 미국에 계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녹음을 통해 인사하는 게 너무나 싫었어요. 기계에다 대고 뭘 말하는 것도 싫었지만, 일단 녹음된 내용을 리플레이해서 들어 보면 정말 싫더라고요. 누구나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잖아요?(웃음) 그런데 어린 시절에는 콤플렉스로까지 생각했던 게 지금은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는 이유들이 된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을 때 입이 너무 큰 거라든지, 말할 때 입이 좀 비뚤어진다든지, 목소리가 이상하다든지 하는 게 제겐 콤플렉스였는데 이젠 그런 것들 때문에 더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시니까요. 그러고 보면, 콤플렉스라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감만 있으면 정반대로 장점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연기 생활17년째시죠. 돌아보면 경력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장면들 몇 개를 말씀해주시겠어요?
“가장 중요한 순간은 아무래도 데뷔할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KBS 엄기백 피디님이 떠오르는데, 그 분이 연기자로서 저를 처음으로 알아봐주신 분이거든요. 제가 탤런트로 데뷔하고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인데, ‘해뜰날’이란 일일 드라마에 주역으로 캐스팅해주셨죠. 첫 시작이 중요한 건데, 감사하게도 제 잠재력을 믿어주셨던 것 같아요. 연기에서라기보다는 제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주신 은인이시죠. 그 다음으로는 한류라는 게 시작되면서 저를 보다 큰 시장으로 나아가게 해준 몇몇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배우로서 색다른 삶을 살게 해준 순간이었죠. ‘달콤한 인생’으로 칸 영화제라는 가장 유명한 영화제에 처음 가서 레드 카펫을 밟았을 때도 떠오릅니다.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칸 현지에서 제 할리우드 에이전트가 될 사람을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포함해서요.”
-이병헌씨는 ‘내 마음의 풍금’과 ‘공동경비구역 JSA’ 사이인 1999년~2000년 무렵에 배우로서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매력과 능력을 보여주시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연기할 때 어떤 점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어떤 인물을 연기하느냐’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 속에 들어가느냐’로 기준이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월등히 좋으면, 정말로 죽어도 하기 싫은 역할일 때만 빼고, 그 이야기에 함께 한다는 것 자체로 기분 좋게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듯해요. 그런데 사실은 좀더 현명해진 것 밖에 없는 것 같긴 해요. 캐릭터만 중요하게 따지면서 골랐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을까 싶거든요.(웃음)”
-저는 이병헌씨의 출연작 중에서 ‘달콤한 인생’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영화는 외모에서부터 연기력까지, 이병헌씨의 매력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것 같거든요. 스스로가 판단하시기에 이 영화가 자신의 경력에 어느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죠. 그 영화를 찍으면서 ‘연출을 하는 사람과 그걸 연기로 표현해내는 사람이 이렇게 정서적으로 일치되고 깊은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구나’ 싶은 느낌에 정말 짜릿했거든요. 김지운 감독님과 인연을 맺은 첫 작품이라는 것도 제게 의미가 있죠. 그 영화를 포함한 몇몇 작품들 때문에 제가 해외 관계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겼고, 할리우드 에이전시까지 생기게 됐죠. 제겐 최고의 영화였어요.”
-내년에 개봉 예정인 해외 진출작 두 편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와 ‘지아이 조’는 ‘악역’이라는 점에서 한데 묶여 거론되기도 하는데, 제작 규모나 감독의 스타일 혹은 간단한 시놉시스만 봐도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셨을 것 같은 추측이 듭니다. 일단 ‘씨클로’와 ‘그린 파파야 향기’를 만들었던 베트남 출신의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훙의 신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 이병헌씨는 어떤 모습인가요.
“영화 자체는 굉장히 관념적이에요. 그렇지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기에 트란 안 훙 감독의 전작들에 비하면 볼거리가 좀더 있을 겁니다. 스릴러적인 느낌도 있고요. 이 영화엔 아름다움과 잔인함이 극과 극의 풍경을 이루며 공존해 있어요. 여기서 제가 맡은 ‘악인’은 겉으론 그냥 패셔너블한 인물인 것 같지만, 내면으론 뼛속까지 악한 인물이에요. 악 자체를 상징한다고 할까요.”
-‘씨클로’의 양조위 같은 인물이 아닐까도 상상했었는데, 훨씬 지독하고 강력한 캐릭터인가 봐요?
“그럴 겁니다. 그 사람이 악인인 것은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이 영화는 종교적인 색깔도 띠고 있어요.”
-그 영화에서는 상대 여배우 트란 누 엔케와의 러브 신도 있었다죠? 그런데 트란 누 엔케는 트란 안 훙 감독의 아내이니까, 남편 옆에서 짙은 연기 하기가 부담스러우셨겠어요.(웃음)
“거의 섹스신 직전까지 가는 짙은 키스신이었는데, 처음엔 정말 고민이 되더라고요. 남편이 감독인데, 아무래도 불편하잖아요.(웃음) 그런데 프랑스에서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정작 본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더군요. 심지어 자식까지 촬영장에 데리고 오더라고요.(웃음) 촬영 때 상대 배우와 반라의 모습으로 안고서 리허설을 하는데, 감독님이 바로 코 앞에서 일일이 지시를 하더군요. 그 장면 연기 초반엔 적잖이 신경 쓰였지만 배우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결국 사람은 적응을 하게 마련이더라고요. 별 문제 없이 촬영을 마쳤습니다.(웃음)”
-‘지 아이 조’는 어떨까요. 내년 여름 시즌에 개봉될 전형적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데요.
“고민을 많이 한 뒤 참여하게 됐던 작품인 만큼, 촬영장에서 의식적으로 즐겁게 작업하려고 애썼어요. 그러면서, 아주 어렸을 때 내가 왜 영화에 빠졌던가를 자문해보니, 현실에서 불가능한 장면들이 스크린에 비칠 때 느꼈던 희열 때문이었던 것 같더라고요. 그 당시 저를 사로잡았던 영화들은 주인공이 날아다니거나 막 칼싸움을 하는 내용이었거든요.(웃음) 그러다 보니 어쩌면 ‘지아이 조’를 통해서 초심으로 돌아간 내가 예전에 받았던 것 만큼 후세대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너무 명분을 쥐어짜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웃음)”
-초기 출연작인 ‘지상만가’에서 이병헌씨가 할리우드에 진출해 성공하는 꿈을 갖고 있는 청년 역을 맡으셨던 게 떠오릅니다. 그 영화에서 그 청년은 결국 꿈 근처에도 못 가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잖아요? 영화 속 상황이었기는 하지만, 이제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상황이 되셨으니, 감회가 무척 새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배우 이병헌에게 할리우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먼 훗날 유명 시상식에 연기상 후보로 올라 초대받는다면, 그땐 행복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까마득한 과거를 돌아보겠죠. 그런데 현재는 이 모든 일을 그저 생활처럼 여기려고 합니다. 제가 자꾸만 ‘아니, 내가 이런 유명한 배우, 저명한 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게 되다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갖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아요. 무대가 어디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요. 사실 물리적인 생활은 이전과 다를 바도 없어요. 할리우드 영화를 찍었지만 매번 촬영장에만 잽싸게 갔다 오곤 했거든요.(웃음)
저는 한류 열풍이 불었을 때도, 일본에 간 적이 별로 없었어요. 사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역할을 맡는 게 ‘지아이 조’ 이후에도 계속될지조차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저는 할리우드에 베이스를 두고서 동양 배우로 한 번 이름을 떨쳐보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지난 17년간 지켜온 제 베이스를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이 땅에서 제가 일하고 싶은 감독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영화나 드라마를 찍고, 그러다가 마치 보너스처럼 좋은 기회가 또 와서 외국에서 할 수 있게 되면 다시 또 한 번 갔다 오는 거죠. 배우로서 중심축을 이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배우로서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 같으세요?
“저도 그게 궁금하고 기대됩니다.(웃음) 누군가 계획을 물으면 저는 항상 무계획이라고 답해왔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은 아니에요.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서 기대도 있고 걱정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배역을 맡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생기고 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삶에서 생겨나는 우연을 즐기는 쪽이시군요?(웃음)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좀 철저하고 계획적일 것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사실은 정반대에 가까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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